Q :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감정적으로 그 비율을 잡아보자면, 1:9 정도로 통제 가능:불가능 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비율의 차이가 발생하겠지만,
중요한 부분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적다는 것이고, 실제로 의식적으로 선택했다고 느끼는 부분들 조차 무의식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1의 통제 가능한 영역이 없이 100% 모든 것이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방임하게 된다면,
그는 그저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짐승이다.
대부분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인지하더라도,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노력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Q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90%)이 그렇게나 크다면,
나의 노력(10%)이 정말 의미 있게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 10%가 실제로 의미를 가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실제로 인생을 살면서 초기의 꿈과 현실적인 조건이 충돌하며 꿈이 바뀌는 90%의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의 가치가 남는 이유는, 통제 불가능한 영역의 영향력이 커서 내 꿈이 줄어들 지언정,
그 줄어든 꿈이라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10%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삶이 아니라 비참한 삶에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부모한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유년기에는, 꿈이나 삶에 방향성에 대한 제약이 없다.
그래서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아이들은 자기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직업을 꿈이라고 말하며, 그 폭도 다양하고 넓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학창시절과 대학생활, 취업, 직장 생활 등 여러 사회적 경험을 겪어가면서 변해간다.
친구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 이성의 마음을 얻는 일, 좋은 집단으로 들어가는 일,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버는 일,
무엇 하나 쉬운게 없고, 예측하기도 어려우며, 의도한 대로 잘 흘러가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꿈과 현실을 타협하기 시작한다.
최고 명문대에서 인서울 대학교로, 인서울에서 수도권 대학으로.
의사에서 공무원으로, 공무원에서 안정적인 회사원으로.
대기업 엘리트 코스에서 대기업 신입으로, 대기업 신입에서 안정적인 직장이면 어디든...
이렇게 점점 줄어든 꿈은 어느새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닌, 외부의 조건들로 타협되버린 '내 꿈이 었던' 것이 된다.
너무나 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평범한 삶을 얻기 위한 개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 노력조차 없었다면 더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만약 꿈에 대한 더욱 더 구체적이고 더 끈질긴 노력이 동반됬다면, 적어도 원하는 꿈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 삶의 대부분이 통제 불가능한 변수더라도, 결국 노력이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
Q : 만약 삶의 대부분을 통제할 수 없다면, 노력과 상관없이 결과가 크게 좌우된다면,
인간에게 「삶을 통제하려는 노력」 자체가 오히려 스트레스와 불행의 근원이 되지는 않을까?
동의한다.
삶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쫓고, 불편함을 기피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삶이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흔히 발생한다.
반론 :
주장에 따르면, 노력(1의 가치)은 현실적으로 가치가 있지만,
결국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꿈의 범위를 축소하거나 바꾸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현실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
최초에 꿈꾸던 ‘이상’을 포기하거나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가 정말로 사라질 수 있는가?
즉, 현실적인 목표를 이루는 것이 진짜 가치 있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라는 자기합리화로 끝나는 건 아닌가?
최초의 이상(꿈)이 있었고, 이를 포기해서 현실적인 목표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면,
사람은 반드시 죽기 전 어느 시점에서 후회한다.
말대로,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하는 자기합리화의 도달점이 현실적인 목표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선택지들을 스스로 후회가 적은 선택지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현실적 선택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고른 선택이 불편하고 힘든 일을 회피해서 고른 선택인지,
스스로의 고찰 끝에 나 자신을 위해 내린 선택인지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반대로, 스스로의 목표가 없이 외부의 요구나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면,
설사 현실적으로 성공했더라도 반드시 후회하고,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살게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Q : 결국,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현실적 성공 여부」가 아니라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의 형태를 명확히 정의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표를 정의하는 것을 이토록 어려워하는 걸까?
해외의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에서로 한정짓는다면,
가장 큰 이유는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삶을 사회적으로 유도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의도성의 유무는 현재 논재와는 동떨어져 있기에 제외한다.)
크게 2가지 요소가 그런 환경에 크게 영향을 준다.
1. 아이들에게 '꿈'의 정의를 장래 희망으로, 장래 희망의 정의를 내가 가질 직업으로 자연스럽게 학습시킨다.
2. 공부를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1번을 먼저 논하자면
어린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직업을 말한다.
사실, 직업 외에 다른 걸 말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직업은 그 꿈에 가까워지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싶다. 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더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꿈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그 '직업'을 가지는 것이 너의 삶의 목표인 것 처럼 말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식시킨다.
그렇다보니, 만약 그 아이가 커서 그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그 아이는 꿈을 잃은 사람이 된다.
삶은 직업을 얻으면 끝나는게 아닌데,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할 환경적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뒤늦게 방황을 하게되고, 극단적으로는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한다.
노력을 통해 직업을 성취하기위해 고통을 견뎌냈는데, 그 뒤에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야하고,
인생은 고통의 반복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으로 이어진 가치관과 생각이 심화되서
우울증이나 자살같은 사회문제로 까지 이어진다.
2번 역시 1번 못지 않은 문제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다.
누군가는 공부를 잘하고 못할텐데, 왜 동일한 내용을 공부하고 경쟁해서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학생들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여러 경험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하고 결정해야하는 시기에,
공부만 잘하면 내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여지는 학교 환경은 누군가한테는 필연적 패배감을 제공한다.
누군가는 암기가 약하고, 누군가는 독해가 어려울 수 있는데, 공정한 환경은 이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학창시절은 한사람의 성인이 되어 사회인으로 녹아들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떤 걸 잘하고, 좋아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해서 어떻게 대가를 받고,
삶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지에 대한 생각과 시행착오를 가장 자유롭게 해야할 시기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모범생.
못하는 학생은 문제아로 취급하게 되는 사회적 환경.
이것이 아이들의 잠재력을 공부라는 잣대로만 평가하게 만들고,
이는 잠재된 인적 자원을 발굴하지 못하고 썩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기초적인 지식은 필요하지만,
이를 납득시키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너무 약하다.
환경적으로 내 삶의 목표에 대한 것을 깊게 고민해볼 기회를 주지 않고,
주변에서 그렇게 하니까 그저 따라가는 형태가 되어버린다.
대학 진학률이 이런 부분을 잘 보여준다.
대학에 진학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게 아닌데,
마치 그런것처럼 느껴지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음을 개개인이 그걸 인식하기 어렵다.
왜냐면 어릴 때 부터 그런 걸 생각하는 연습을 한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안해도 되고, 안하는게 자연스럽고, 의문을 가지는게 이상한 사회 속에서
혼자 다른 선택을 하기 두렵게 만든다.
즉, 정리하자면
「인간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현실적 목표의 성취가 아니라,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명확히 이해하고 정의하는 과정 그 자체다.」
하지만 지금 두 가지 사회적 환경(꿈=직업이라는 잘못된 정의, 공부라는 하나의 평가 기준)이
스스로 목표를 찾고 정의하는 능력 자체를 약화시켜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삶을 후회할 가능성이 커진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목표를 정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환경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반론.
1. 인간이 스스로 내린 선택도 결국 외부 환경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 네가 아무리 깊은 고민 끝에 스스로 내렸다고 생각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 결정은 네가 살면서 경험한 환경과 교육, 주변 사람들의 가치관 등에 무의식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즉, 너는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네가 자란 환경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이미 무의식적으로 너의 선택 범위를 한정지어 놓은 것이다.
- 결국 너의 ‘자발적 선택’도 너의 논리에 따르면 어느 정도는 외부적 강제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도 결국 외부의 조건을 너의 내면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2. 자기 스스로 설정한 목표가 지나친 강박과 책임감을 유발할 수 있다.
-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목표를 스스로 정의하면 그만큼 목표에 대한 기대와 책임감이 커질 수밖에 없어.
-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경우 외부가 아니라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강력한 자기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은 오히려 더 깊은 스트레스와 불행을 초래할 수 있어.
- 외부의 강제로 설정된 목표는 실패하면 외부(사회, 환경 등)를 탓할 수라도 있지만, 스스로 선택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오는 자책과 실망감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어.
Q. 자기 스스로 목표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정말로 외부에 의해 정해진 목표보다 항상 더 나은 것인가?
스스로의 목표가 실제로 더 강한 책임감, 실망, 강박을 유발할 수 있다면,
차라리 외부적 환경이 제시한 목표를 따라가는 것이
스트레스나 부담감을 줄여서 삶을 더 편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옳은 의견이다.
허나, 1번의 경우처럼 일생에 걸쳐 형성된 가치관으로 그 선택이 옳다고 느끼도록 유도당했다고 하더라도.
해당 개인이 만족감을 느끼고 후회를 덜 하게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번의 경우도 역시 말한대로, 남을 탓할 수 없게되는 온전한 자기 책임을 유발하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편하고 일반적인 선택을 하는 것에 비해 더 강한 자기비판과 강박을 느끼게 된다.
고통스러움의 비중을 후회에 더 크게 두느냐, 현재의 상황으로 인한 고통에 더 크게 두느냐에 따라 가치가 갈릴 수 있다.
Q.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를 깊이 고민하는 과정 자체는 결국 의미 있고 옳은 일이지만,
만약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났고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고통스러워하게 된다면,
그 고통의 크기가「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간 사람이 느끼는 아쉬움이나 후회」보다
더 크고 치명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동의한다.
수동적인 삶이 어떤 사람에겐 더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결국 목표 설정 역시 만족감을 위한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장 역시 목표 설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도록 내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기에 나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침으로 어떤걸 삼을 수 있는가?
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근본적으로 만족하는 삶을 찾을 수 없고,
평범한 삶이 내가 가장 만족하는 삶의 형태라고 내 가치관이 유도 되더라도,
내 스스로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사고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후회는 발생하게 되지 않는가?
상대측 결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후회를 최소화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단 하나의 보편적인 지침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내린 결정의 결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태도」이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든, 설정하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 살든,
결국 후회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그 책임을 외부로 돌리거나,
자신이 원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보편적 방법은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그 결과가 내가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해당 결론은 타당하고, 조금 더 본질적으로 들어간 결론임에 동의한다.
하지만 하나의 모순이 남는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든 말든, 내가 고른 선택에 납득하고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책임을 남이나 외부요인에 전가하는게 아니라, 내 선택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근거가 확실해야 한다.
나는 왜 이 선택을 했고, 이 선택이 왜 옳은 선택인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삶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대로 그저 살아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후회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 아주 높은 확률로 책임을 회피 하고자 할 것이다.
내가 세운 삶의 목표가 남들 사는대로 평범하게만 살자고 세운게 아니라, 그저 그게 덜 고통스러워서 선택했다면,
내 스스로 주도적인 삶을 선택한게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이든 결과든 후회되는 부분에 대해서 '내가 고른게 아니다'라고 회피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그렇다보니 이럴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게 아닌가?
그럼 반대로 역설적으로, 내 선택에 책임을 지는 보편적인 지침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의 삶의 목표 설정을 위해 노력하는 건 평범한 삶의 지향 유무를 떠나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되는게 아닌가?
결국 인간이 후회를 최소화하고 자기 선택의 책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려면,
자기 삶의 목표를 ‘평범한 삶을 살든, 특별한 삶을 살든 간에’
반드시 깊게 고민하고 명확히 설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 결론.
- 인간은 삶의 대부분(90%)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지만,
나머지 통제 가능한 작은 영역(10%)을 통해서라도 스스로의 삶을 명확히 정의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왜냐하면 그 작은 부분에서의 선택이 결국 삶의 만족감과 후회를 결정하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 환경적 조건이 강력한 영향을 주더라도, 스스로 명확히 고찰하고 정의한 목표와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후회나 고통을 줄이고, 책임감과 만족감을 키울 수 있다.
- 따라서 「자기 삶을 명확히 정의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은 고통과 강박을 수반할지언정,
인간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과정이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정의하고, 선택의 근거를 분명히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오는 강박과 책임의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이 보편적으로 후회를 최소화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본질적인 과정이다.